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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징검다리] 네번째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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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4,884회 작성일 16-01-0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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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의 젠틀맨
, 성웅씨가 태어난 33년 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ABO부적합핵황달이라고 들어본 적 있수? 그냥 황달도 아니고 황달이라니... 옛날 어른들 말에 왜 피가 안 맞아서 그런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게 이렇게 근거가 있는 건지 몰랐다우. 글쎄.

 

ABO부적합핵황달로 출생하면 12시간 이내에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일반병원에서 낳아서 늦게 발견됐습니다. 모두 그저 신생아 황달이 잠깐 도는 줄로만 알았어요. 출산한지 3일 되는 날 퇴원을 했는데 집에 가서 이틀 있어보니까 안되겠더라구요. 열이 너무 오르고 너무 울어 그길로 바로 위생병원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생후 7일째가 되던 날 ‘ABO부적합핵황달진단을 받고 동맥을 뚫어 피를 갈아 주는 교환수혈을 한 뒤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아들은 치료방법이 없는 증세가 아니었음에도 늦게 발견되어 장애를 얻게 됐어요. 결국 황달증상이 뇌로도 영향을 미쳐 언어, 운동세포의 성장이 어렵게 되어버렸던 거죠.

 

 

듣도 보도 못한 진단으로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날마다 울었어요. 왜 유행가 가사에 뜨거운 눈물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때 눈물이 진짜 뜨겁다는 걸 알았습니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면 눈 밑이 물집 잡힌 것 마냥 부풀어 올라요. 꼭 화상 입은 것처럼 말이에요. 자식이 아니고서는 그런 경험 못하죠. 자식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짜지도 않더랍니다. 고통이 그만큼 극심했어요. 그 고통과 두려움에 성웅이가 우리 부부에게는 첫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6년 동안은 아이를 안 가졌어요.

염려되는 일도 많고, 장애 자녀를 키우는 현실도 힘들고, 둘째 아이에 대한 생각 자체를 못 하셨을 것 같아요. 장애 자녀를 둔 부모로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셨어요?

 

성웅이가 6살이 될 때까지 뇌성마비의 표본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 자세한 증세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지요. 우리 아이야 지금은 누워 있으니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고...장애 자녀를 둔 부모면서도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지요.

 

그 당시만 해도 장애라고 하면 청각, 소아마비만 인식하고 있었던 때였거든요? 실제 우리가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장애인들은 그 사람들 밖에 없었거든요. 보이는 장애만 장애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한 날은 국립재활원에 아이를 입학시키러 갔다가 우연찮게 식당에 들렀는데, 그 때 처음으로 뇌성마비장애인이 다 성장한 모습을 봤어요. 전국에 있는 장애인들이 다 모인 곳이다 보니 장애의 모든 모습을 한 번에 맞닥뜨린 거죠. 각가지 방법으로 불편하게 밥을 먹는 장애인들을 보고 솔직히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식당에 한달은 못갔던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웠어요. 말도 못하게... 글쎄, 내가 방광염에 걸렸을 정도라니까. 갑상선에도 이상이 생기고, 우울증도 오고...

 

당시 성웅이 서울대병원 담당 의사선생님이 여자 분이셨는데 제가 너무 힘들어 보였던지 둘째 아이를 입양해보길 권하시더라구요. 삶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서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가 시부모님도 모시고 살았는데 분가도 권유하시더라구요. 그 분만 그런게 아니라 위생병원 담당 선생님도 둘째를 가지라고 설득하셨어요.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으니 나만 믿고 둘째를 낳으라고 아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셨죠. 35세 노산에다가 갑상선 증세도 있어 검사를 매 번 받아가며 6개월 후에 임신시도를 했어요.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가 모두 협업해서 둘째 순산에 심혈을 기울여 주셨어요. 첫 아이를 낳고 6년 동안 아는 게 많아져 그런지 둘째를 출산할 때는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오만 장애가 눈앞을 스쳐가 산고를 넘어섰는지 아픈 줄 몰랐어요. 혹시하는 걱정에 말입니다.

 

둘째 아이는 제왕절개로 태어났고, 낳자마자 준비된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그러니 황달도 가라앉고 점점 혈색이 돌더라구요... 기쁘기도 했지만 그 순간 첫 째에게 너무 미안했어습니다. 지금 이 반나절을 그 때의 내가 놓쳐서...너무 무지해서...첫 째에게 꼭 장애를 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그만큼 성웅씨 재활을 위해 정말 무던하게 노력하셨겠어요.

 

우리 세대 엄마들은 선배가 없었다고 자주 말한답니다. 정보도, 사람도, 기술도, 아무것도 없었던 기막힌 시절이었어요. 장애 아이를 키우려면 맹모처럼 굴어야 했어요. 아이의 병명을 알고부터는 위생병원에서 살았어요. 자극에 민감하고 천식이 심해 그 시대에도 미니산소통을 매고 다니고, 생후 6개월부터는 서울대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보이타 치료의 첫 임상 환자로 등록도 시키고...부지런히 다녔습니다.

 

또 라디오를 통해 국립재활원에서 유치원을 개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가니 T.O가 딱 하나 남아있어 운 좋게 거길 다녔죠. 그 때문에 장위동에서 수유리로 온 가족이 이사도 했습니다. 그렇게 17년간을 국립재활원에 오갔어요. 오죽하면 작은 아이의 별명이 재돌이가 되었다니까요. 100일 떡도 그리 돌렸습니다. 국립재활원 앞 큰 버드나무 밑에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으면 먹을 것 잔뜩 싸가지고 가 간난장이인 둘째를 맡기고 첫째 치료를 다니고 그랬습니다.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시간이 나는 대로 운전도 배워 차를 몬지도 26년이 넘었네요. 카시트도 없던 때라 앞좌석을 최대한 뒤로 젖혀서 아이를 눕혀 다니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영악스러운 엄마였던 것 같아요. 아직 국립재활원에 계시는 치료사 선생님들이 그러세요. 비가 오면 유모차에 비닐을 씌워 마당을 가로 질러 들어오던 제 모습이 생각난다고...요즘은 유모차도 좋아서 방수도 다 되지 않아요? 이럴 때는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답니다. 아무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치료에 빠질 생각은 절대로 안했어요.

 

재활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이 대학병원밖에 없으니 서울대병원과 국립재활원을 오가면서 그것도 부족해, 개인물리치료사도 집으로 불러 일주일에 3, 3년을 시켰습니다. 아이 이유식도 그림처럼 해다 먹였어요. 동태 살을 밤새 말리고 갈아서 먹이고...아이가 장애 때문에 잘 못 먹으니까 거버라고 옛날에 분유로 유명한 제품이 있어요. 비싸도 좋은 걸 먹이려고 도매상에 가서 아예 1년치를 사오고, 면 귀저기도 하기스(기저귀 회사) 본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사정 설명을 다 하고 대량으로 구입할테니 할인해달라 배짱 있게 거래도 해서 인쇄가 불량으로 나온 제품들만 싸게 받기도 하고...요즘은 쿠팡이니 티몬이니 뭐니 하는 소셜커머스들이 많다지만, 그런게 없으니 어떡하우. 진짜 나는 유별났어요.(웃음)

 

보조기구도 당시 없으니 요셉의 집이라는 목공소에 찾아가서 직접 스탠딩 체어를 제작해왔어요. 까치발을 교정하려고 아이를 매일 코너에 세워 놓고 발에 멈이 시퍼렇게 들도록 무섭게 훈련을 시켰어요. 호흡도 길게 시키려고 촛불을 켰다 껐다를 반복 시키고, 문어발같이 질긴 음식도 계속 씹게 하고...아주 극악무도한 엄마였지.

때에 맞춰 정형신발도 다 맞춰주고, 유모차도 5개나 해먹고(웃음) 휠체어도 맞춤사이즈가 없어 발품 팔아 찾아다니고...그러는 동안 내 관절이 다나갔어요.(웃음) 그래도 이런 노력 때문에 말도 흉한 전사지마비라고 했던 우리 아이가 17년 만에 걷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우리 아들한테 농담으로 그래요. 원가가 너무 많이 든 아들이라고.

 

그 세월 참 억척스러웠어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열심히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방치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계를 모르고 덤비니까 우리 아이가 받은 물리적인 고통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서요.

 

 

누군가의 엄마가 되려면 정말 큰 각오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어머님들 인터뷰를 하다보면 한없이 존경스럽다가도, 나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일단 엄마가 되면,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어집니다. 엄마는 자식이라면 생사를 걸게 되어 있어요. 달려오는 기차도 막게 되는 힘이 생긴달까? 정확히 말하자면 환경이 그렇게 몰고 가요. 엄마들이 강해서라기보단 환경이 그렇게 해야만 하게 만들었어요.

 

나는 해보는데 까지는 다 해보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웅이를 데리고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도 찾아갔어요. 그 곳 기숙사에서 숙식하면서 직업적성평가도 하고, 직업적응훈련도 받고 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성웅이는 딱 2주 있었어요. 직업까지만 딱 찾아주자 했는데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직업을 갖기에는 인지능력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왔어요. 사실 우리 아들이 사칙연산을 못하거나 독해능력이 떨어지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 운동능력이 그곳에 있는 훈련생들 보다 많이 떨어지다 보니 시간 안에 해내지를 못하더라구요. 출석부도 이렇게 보니 지각이 많더라구요. 아침에 일어나 단장을 하고 나가야 되는데 그럼 시간이 남들의 배로 드니까 자꾸 늦었던 모양이에요. 그래도 룸메이트로 있던 친구가 잘 도와줘서 2주는 버텨냈어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도 그렇게 노력을 해왔어요. 엄마 뿐 아니라 자식도 해온 일이에요.

 

 

둘 다 노력해온 일이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에요. 이외에도 이제 장애 자녀를 키워나갈 어머니들을 위해 조언이 될 말씀 좀 부탁드려요.

 

요즘은 참 좋은 시절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활동보조제도도 생기고, 엄마들도 똑똑하고, 정보도 많고. 좋기만 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다른 고민들이 많습디다. 좋은 시절을 만나도 힘든 점이 다 있더라구요. 성웅이 때보다 중한 아이들이 많아져 부모들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고...진짜 그건 엄마들만 알지...그런거 다 함께 아는 사람끼리 말로 나누면 돼요. 그럼 속도 좀 풀리고 그러죠. 시간이 지나도 수다만한 약이 없어요.(웃음)

또 뭐가 있나...! 정말 중요한 거! ‘내 건강은 절대 잃으면 안됩니다. 아이들도 휠체어에서 내리겠다고 엄마들이 번쩍번쩍 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다가 관절이고 허리고 나가면. 아이고. 나이 들어서는 나도, 아이도 힘들어요. 엄마가 아프면 둘 다 아무것도 못해요.

 

그리고 너무 아이한테 돈을 퍼부으면 안돼요.(웃음) 우리세대보다 여유롭다고 치료만 쫓아다니지 말고 가늘고 길게 살자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아이 뿐 아니라 본인 노후대책을 위한 저축은 필수에요.

 

또 아이한테 욕심을 안 부려야 된다고 해야 되나? 장애는 장애에요. 치료해서 고칠 수 있는게 아니지요. 우리 아이의 건강을 유지하고 지켜낸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온 가족이 지치지 않고 살 수가 있어요. 지난 시절 그걸 고쳐보려고 너무 드세게 살다보니까 그게 다 허사 같게 느껴질 때도 있더라구요.

 

마지막으로 엄마가 본인의 정서적 지지관계를 잘 갖춰놔야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없어도 우리 아이를 좋은 시설에 맡겨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 좋은 벗, 그리고 예의를 갖춘 벗이 곁에 있을 수 있게 본인이 잘 살아야 돼요. 그 중에 무엇보다 시댁과의 관계를 잘 다져 놓으면 좋은 것 같아요. 시댁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은 못 받았지만 정서적으로는 긴밀히 지내와 그런지 오십대 이후에는 시댁에서 더 많이 찾아주고 알아주더랍니다. 내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아이를 핑계로 경조사를 빠지거나 하지 않았어요. 내 선에서는 최선을 대해 주변을 챙겼더니 그 보상이 오더라구요. 아무리 어려워도 내 도리는 하고 살아야 돼요. 이 말들은 꼭 한 번들 봤으면 좋겠어요.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성웅씨에게 바라시는 점은 뭐가 있을까요?

 

바라는 점은 이제 정말 없어요. 그동안 재활을 위해 치료, 학업, 직업 등 생애주기별로 다 찾아다녔는데, 그러면서 우리 아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 안하고 성인인 자녀가 자기 뜻대로 살게 두려 합니다. 지난 세월 하늘로 돌아간 성웅이 또래 장애인들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 아등바등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래도 한 가지가 남았다면 이제 재활이 아닌 생활을 찾아야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서울시립뇌성마비복지관은 어떤 곳인가요? 또 어떤 곳이 되었으면 하시나요?

 

성인프로그램을 이용하기 우해 복지관에 온지도 10년이 넘었습니다. 이곳은 내 아들의 삶 터전이에요. 지방으로 이사하고 싶었는데 여기만큼 뇌성마비장애인 전문 프로그램을 갖춘 곳이 없어 못 갔어요. 보치아를 다루는 곳도 지방에는 별로 없더라구요.

그런데 이곳에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면서 모르는 사람들이 더 늘었어요. 도예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도 나로센터로 떠나고...그래서 성웅이가 벗을 사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고, 성인들을 위한 보치아 교실 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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