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나의 단식투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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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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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4-09-0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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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단식투쟁 경험
오늘 유민이 아빠가 단식을 그만 두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잘 한 일이다. 사람이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 전 나도 화가 치밀어, 모든 단식, 모두 걷어치우기를 주장한 바도 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지만, 나도 단식투쟁의 경험이 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이다. 박 정권 하에서라고 하니, 무슨 ‘삼선개헌’이나, ‘유신’반대 투쟁 같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맥락이다.
1976년 2월의 일이다. 대학입시에서, 학과시험에는 거뜬히 합격한, 나를 비롯한 장애인 학생 동료들이 유명 사립대학에서 줄줄이 신체검사에 낙방한 것이다. 당시 1976년의 자료에 의하면, 조사에 응답한 전국 유명대학 24개교 중 21개교가 전체, 혹은 일부학과에서 장애인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의 현실이었다. 내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도 나와 같이 투쟁에 참여한 친구만으로도 9명이 학과시험 합격 후, 신체검사에서 최종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법학과의 이종철, 작곡과의 박원숙, 치의예학과의 황대연, 이원일 등등 이름도 생생한 친구들이다.
당시 나는 설령 내가 대학에 못 가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만 공부밖에는 희망이 없는 장애인 후배들의 꿈이 이토록 무참히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모일 수 있었던 단체인 ‘한국소아마비협회’를 근거로 같은 이유로 여러 대학에서 불합격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그런 약자들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투쟁방식을 정하여 결의했다. 바로 단식투쟁이었다. 우리는 즉각 구의동의 ‘소아마비회관’에서 단식투쟁의 실행을 준비했다. 내가 준비위원장 겸 대변인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들을 살핀 따뜻한 마음의 여러 의사선생님들은, 특히 장애로 인해 신체적 밸런스가 불균형하고, 건강한 학생들에 비해 특수하게 건강상의 위험요소가 더 있는 10대의 어린 장애 학생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절대 절명, 생애의 극한 서러움에 겨웠던 우리들의 단호한 결의를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과 타협을 보았다. 단식은 하되 충분히 물을 마시고, 하루에 3번 정도 흰 우유를 한 병씩 꼭 마시며, 심하게 어지럽거나, 장애로 인해 남달리 약한 다리나 팔의 통증이 있을 때는 바로 수액을 맞는다는 조건으로 단식에 들어갔다. 그래서 당시 우리는 그 단식투쟁을 ‘우유단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단식 중에, 우유 먹을 시간이 되면, 염려와 안쓰러움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우리 입에 우유를 부어넣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처절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는, 제도나 공동체적 인식 면에서 말도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참으로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아주 좋은 사회면 취재거리였던 우리들의 결의와 단식투쟁을 상주하며,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당시의 신문, 방송 등 매스미디어 어느 한 곳도, “그들은 단식투쟁이라면서, 시간을 정하여 우유를 마시고 있다”던가, 그래서 “이 단식은 거짓”이라든가 하는, 단 한 줄의 비판, 아니 사실 보도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방송카메라나 신문사의 촬영 팀은 우리가 시간을 맞추어 한 사람씩 교대로 우유를 마실 때면 카메라를 내리고 혹은 돌아가던 카메라를 커버리곤 하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들 각자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만약 입학이 다시 허락된다면, 함께 공부할 대학의 동료 친구, 선후배들이 자진해서 ‘소아마비회관’으로 찾아와 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일부는 같이 단식에 동참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당시 이화대학부속고등학교의 동기, 선후배들, 그리고 함께 공부해 갈 연세대학의 친구들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었던 사실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그 때 다시 일어났다. 지금의 정권과 특수한 관련이 있는 박정희 정권과 당시 대통령은 우리들의 단식투쟁과, 정당하고 당연한 요구에, 그야말로 ‘한량없는 은혜’를 내렸다. 신체검사에서 낙방한 장애학생들을 각 해당대학은 무조건 합격시키라는 대통령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만약 이들 대신에 이미 다른 학생들이 추가합격으로 대학입학이 결정된 경우라면, 특례조처로 그 해에 한하여 정원 초과로라도 모두 더하여 합격시키라는 추상같은 조처였다.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 친구들, 투쟁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은 대통령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총’에 감격했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변인이던 나는 “저는 이 조처가 결코 어떤 특혜이고,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며, 잘못되었던 것이 바로 잡혔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가, 심지어 우리 어머니에게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정권은 정치적 상황 상 민심에 부담이 컸고, 정치적 곤경도 없지 않았던 상황에서, 장애학생들에 대한 이른바 ‘은혜로운 선처’로 인해, 일정부분 여론이 크게 호전될 수 있는 호기를 절대 놓치지 않았던 측면이 분명이 있었다. 당시에도 역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크게 부르던 각종 미디어들은, 이 사건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루었다. 물론 초점은 ‘대통령의 따뜻한 은총’에 집중되었지만 말이다.
작금의 단식정국을 보면서, 남달리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그 정권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지금의 권력은, 그런, 당연하지만, 특별한 것처럼 공을 내세울 수도 있는 ‘특별한 조처’나, ‘은총’도 선택할 수 없는 옹졸함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사회 역시 얼마나 다른 면에서는 발전했는지 몰라도, 단식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나, 각종 루머들을 살필 때, 그 때 그 시절 우리의 ‘우유단식’에 눈을 감아주며, 오히려 충분히 마시고, 건강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단식투쟁을 하라고, 눈물을 같이 훔치던, 당시 기자양반들 보다도 천박한 것이 분명하다.
1976년 2월 각 일간지 사회면을 도배했던 우리들의 기사 스크랩의 일부.
[출처] 나의 단식투쟁 경험 |작성자 단비
오늘 유민이 아빠가 단식을 그만 두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잘 한 일이다. 사람이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며칠 전 나도 화가 치밀어, 모든 단식, 모두 걷어치우기를 주장한 바도 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지만, 나도 단식투쟁의 경험이 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이다. 박 정권 하에서라고 하니, 무슨 ‘삼선개헌’이나, ‘유신’반대 투쟁 같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맥락이다.
1976년 2월의 일이다. 대학입시에서, 학과시험에는 거뜬히 합격한, 나를 비롯한 장애인 학생 동료들이 유명 사립대학에서 줄줄이 신체검사에 낙방한 것이다. 당시 1976년의 자료에 의하면, 조사에 응답한 전국 유명대학 24개교 중 21개교가 전체, 혹은 일부학과에서 장애인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의 현실이었다. 내 모교 연세대학교에서도 나와 같이 투쟁에 참여한 친구만으로도 9명이 학과시험 합격 후, 신체검사에서 최종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법학과의 이종철, 작곡과의 박원숙, 치의예학과의 황대연, 이원일 등등 이름도 생생한 친구들이다.
당시 나는 설령 내가 대학에 못 가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만 공부밖에는 희망이 없는 장애인 후배들의 꿈이 이토록 무참히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모일 수 있었던 단체인 ‘한국소아마비협회’를 근거로 같은 이유로 여러 대학에서 불합격된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그런 약자들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투쟁방식을 정하여 결의했다. 바로 단식투쟁이었다. 우리는 즉각 구의동의 ‘소아마비회관’에서 단식투쟁의 실행을 준비했다. 내가 준비위원장 겸 대변인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우리들을 살핀 따뜻한 마음의 여러 의사선생님들은, 특히 장애로 인해 신체적 밸런스가 불균형하고, 건강한 학생들에 비해 특수하게 건강상의 위험요소가 더 있는 10대의 어린 장애 학생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절대 절명, 생애의 극한 서러움에 겨웠던 우리들의 단호한 결의를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들과 타협을 보았다. 단식은 하되 충분히 물을 마시고, 하루에 3번 정도 흰 우유를 한 병씩 꼭 마시며, 심하게 어지럽거나, 장애로 인해 남달리 약한 다리나 팔의 통증이 있을 때는 바로 수액을 맞는다는 조건으로 단식에 들어갔다. 그래서 당시 우리는 그 단식투쟁을 ‘우유단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단식 중에, 우유 먹을 시간이 되면, 염려와 안쓰러움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우리 입에 우유를 부어넣던,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처절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한국사회는, 제도나 공동체적 인식 면에서 말도 안 되는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참으로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아주 좋은 사회면 취재거리였던 우리들의 결의와 단식투쟁을 상주하며,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당시의 신문, 방송 등 매스미디어 어느 한 곳도, “그들은 단식투쟁이라면서, 시간을 정하여 우유를 마시고 있다”던가, 그래서 “이 단식은 거짓”이라든가 하는, 단 한 줄의 비판, 아니 사실 보도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방송카메라나 신문사의 촬영 팀은 우리가 시간을 맞추어 한 사람씩 교대로 우유를 마실 때면 카메라를 내리고 혹은 돌아가던 카메라를 커버리곤 하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들 각자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만약 입학이 다시 허락된다면, 함께 공부할 대학의 동료 친구, 선후배들이 자진해서 ‘소아마비회관’으로 찾아와 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일부는 같이 단식에 동참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당시 이화대학부속고등학교의 동기, 선후배들, 그리고 함께 공부해 갈 연세대학의 친구들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었던 사실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 그 때 다시 일어났다. 지금의 정권과 특수한 관련이 있는 박정희 정권과 당시 대통령은 우리들의 단식투쟁과, 정당하고 당연한 요구에, 그야말로 ‘한량없는 은혜’를 내렸다. 신체검사에서 낙방한 장애학생들을 각 해당대학은 무조건 합격시키라는 대통령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만약 이들 대신에 이미 다른 학생들이 추가합격으로 대학입학이 결정된 경우라면, 특례조처로 그 해에 한하여 정원 초과로라도 모두 더하여 합격시키라는 추상같은 조처였다.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 친구들, 투쟁에 동참했던 모든 이들은 대통령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총’에 감격했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변인이던 나는 “저는 이 조처가 결코 어떤 특혜이고,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이며, 잘못되었던 것이 바로 잡혔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가, 심지어 우리 어머니에게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정권은 정치적 상황 상 민심에 부담이 컸고, 정치적 곤경도 없지 않았던 상황에서, 장애학생들에 대한 이른바 ‘은혜로운 선처’로 인해, 일정부분 여론이 크게 호전될 수 있는 호기를 절대 놓치지 않았던 측면이 분명이 있었다. 당시에도 역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크게 부르던 각종 미디어들은, 이 사건을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다루었다. 물론 초점은 ‘대통령의 따뜻한 은총’에 집중되었지만 말이다.
작금의 단식정국을 보면서, 남달리 그 때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그 정권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지금의 권력은, 그런, 당연하지만, 특별한 것처럼 공을 내세울 수도 있는 ‘특별한 조처’나, ‘은총’도 선택할 수 없는 옹졸함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사회 역시 얼마나 다른 면에서는 발전했는지 몰라도, 단식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나, 각종 루머들을 살필 때, 그 때 그 시절 우리의 ‘우유단식’에 눈을 감아주며, 오히려 충분히 마시고, 건강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단식투쟁을 하라고, 눈물을 같이 훔치던, 당시 기자양반들 보다도 천박한 것이 분명하다.
1976년 2월 각 일간지 사회면을 도배했던 우리들의 기사 스크랩의 일부.
[출처] 나의 단식투쟁 경험 |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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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님의 댓글
박신 작성일이글은 제 고등학교 3년선배이신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지금은 일본에서 신학대 대학교수로 활동중이신 선배님의 글을 퍼온것입니다